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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중뿌리알기 > 현풍(포산)곽씨 연원

郭氏의 연원(淵源)

始祖이신 正懿公(諱 鏡)의 上系에 관하여 여러 문헌을 살펴보면, 古代 중국 周나라의 始祖 后稷(후직: 姓은 姬, 이름은 棄) 의 14세손 文王(王季의 子, 이름 昌)이 그의 동생 虢叔(괵숙)을 虢나라에 封하고 郭公이라 칭하니 이로써 郭氏 姓이 출현하였으며, 이로부터 周-秦-漢-晋-唐-宋 시대에 걸쳐 약 3,000여년간 중국의 대성(大姓)으로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1579년판 明나라 凌迪知가 편 古今萬姓統譜에 “周文王季弟虢叔受封 於虢 號曰郭公因以爲氏”라 함)

中國의 郭氏門中에서 이름난 人物은 다음과 같다(역대중국인명사전에서 전제함)

곽외(郭隗) : 전국시대(戰國時代) 연(燕)나라 사람. 燕나라 소왕(昭王)이 제(齊)나라에 복수를 하고자 인재를 구할 때 그 방법에 대하여 郭隗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가 천금시마(千金市馬) 이야기로 깨우치면서 “먼저 저부터 시작하십시오(先從隗始선종외시)”라 하며 “저 같은 사람도 예우를 받는다면, 저보다 더 현명한 사람들이 어찌 천리가 멀다하겠습니까” 말했다. 이에 왕은 기뻐하며 그를 위하여 궁(宮)을 짓고 스승의 예로 대우했다. 아울러 황금대(黃金臺)를 지어 현자(賢者)를 초빙하니, 악의(樂毅), 추연(鄒衍) 극신(劇辛) 등의 인재들이 다투어 찾아와 齊나라의 국력이 부강해 졌다고 함.

* 천금시마(千金市馬)

옛날 어떤 왕이 천금을 들여 천리마를 구하려 했으나, 3년이 지나도 얻지를 못했습니다. 이 때, 측근에 있던 한 사람이 천리마를 구하여 오겠다고 나섰습니다. 이에 왕은 그에게 임무를 맡겨 내보냈습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천리마 있는 곳을 알아내었습니다. 그러나 말은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말의 머리를 5백금을 주고 사서 돌아왔습니다. 왕은 크게 노하여 말합니다.
“산 말을 사오라고 하였는데, 어찌 죽은 말을 사왔으며, 5백금이나 버렸는고?
그자는 “죽은 말조차 5백금으로 사들였으니, 항차 산 말은 어떻겠습니까? 천하의 사람들은 왕이 반드시 말을 사려고 함을 알 것입니다. 하니 말은 이제 곧 모여들 것입니다“.
그로부터 1년도 지나지 않아 천리마가 3필이나 모였다고 합니다.
* 악의(樂毅) : 전국시대 위(魏)나라사람. 연소왕에게 발탁되어 제나라의 70여성을 함락하였으나, 제나라장수 전단의 반간계에 걸려 실패함.
* 추연(鄒衍) : 전국시대 제(齊)나라 사람. 음양설의 비조(鼻祖), 燕나라 소왕 때 국정을 맡았다.
* 극신(劇辛) : 전국시대 조(趙)나라 사람, 연소왕 때 국정을 맡았다.

곽태(郭太)(128~169) 후한(後漢) 태원 계휴(太原 界休) 사람.

字는 임종(林宗)이다. 전적(典籍)에 두루 정통했고, 담론(談論)을 잘 했으며 높은 학문과 덕으로 일세의 추앙을 받았다. 도를 지닌 사람으로 천거되어 곽유도(郭有道)라 불렸으며, 향리에 은거하며 가르친 제자가 수천 명에 달했다. 관부(官府)에서 불러도 나가지 않았으며, 언행이 신중하여 당고(黨錮)의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문선(文選)에 채옹(蔡邕)이 지은 “곽유도비문(郭有道碑文)”이 실려 있다.

곽가(郭嘉)(170~207) : 후한(後漢) 말 영천 양적(潁川 陽翟) 사람.

字는 봉효(奉孝)이다. 처음 원소(袁紹)를 섬겼으나, 원소의 그릇이 큰일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순욱(旬彧)의 추천으로 조조(曹操)에게 귀의하여 섬겼다. 사공군좨주(司空軍祭酒)가 되어 조조가 모주(謀主)로 많이 의지하였으며, 정벌을 나설 때마다 뛰어난 계책을 건의하여 조조의 큰 신임을 밭았다. 유양정후(洧陽亭侯)에 봉해졌고, 시호(諡號)는 정(貞)이다.

곽거(郭巨) : (後漢?, 晋?) 하서 융려(河西 隆慮) 사람.

중국 고대 24효(孝)중 한사람으로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효성이 지극했다.
아내와 품팔이하여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어머니가 식사 때 마다 손자에게 음식을 나누어주어 아이 때문에 어머니가 굶주리게 되자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그렇지 못하다” 하고 땅을 파고 아이를 묻어버리려 했다. 그때 돌 뚜껑이 나와 열어보니 황금 한솥이 담겨져 있으며, 하늘이 내린 것이라 적혀져 있었다. 이로써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고, 아이도 잘 길렀다.

곽박(郭璞)(276~324) : 동진(東晋) 때 하동 문희(河東 聞喜)사람.

박학하여 천문(天文)과 고문기자(古文奇字), 역산(曆算), 복서술(卜筮術)에 밝았고, 특히 시부(詩賦)에 뛰어났다. 진원제(晋元帝) 때 저작좌랑(著作佐郞)이 되어 왕은(王隱)과 함께 진사(晋史)를 편찬함. 나중에 왕돈(王敦)의 모반계획을 만류하다 왕돈에게 피살됨. 홍농태수(弘農太守)에 추존됨. 저서에 “ 이아주(爾雅注), 산해경주(山海經注), 주역동림(周易洞林) 등이 있다.

곽자의(郭子儀)(697~781) 당(唐)나라 화주 정현(華州 鄭縣)사람.

무예로 천거되어 천덕군사겸구원태수(天德軍使兼九原太守)되었다.
현종(玄宗) 때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가 되어 반란을 일으킨 安祿山의 무리를 토벌하여 하북(河北)의 10군(郡)을 회복하였고, 하북에서 사사명(史思明)을 격파했다. 숙종(肅宗)이 즉위하자 관내하동부원수(關內河東副元帥)가 되어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을 수복했다. 그 공으로 중서령에 발탁되고, 분양군왕(汾陽郡王)에 봉해졌다. 그 후 덕종(德宗)이 즉위하자 상보(尙父)로 존중되고 병권은 회수되었다.
시호(諡號)는 충무(忠武)이다.
부친은 곽경지(郭敬之)이며, 위주(渭州), 길주(吉州), 수주(綏州), 수주(壽州)의 자사(刺史)를 지냈다.

곽위(郭威)(904~954) :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 후주(後周)의 황제(皇帝). 형주 요산(邢州 堯山) 사람. 字는 문중(文仲).

후한(後漢)은제 때 추밀사, 평장사를 지냈으며, 은제가 사람을 보내 자기를 해치려는 것을 알고 군사를 일으켜 제거하고 유윤(劉贇)을 황제로 세웠으나, 병변을 일으켜 후한을 대신해 칭제(稱帝)하고 나라이름을 주(周)라 하였다. 재위기간은 3년이며, 묘호(廟號)는 태조(太祖)이다.

* 오대십국시대(907~960) :

중국역사에서 당(唐)나라가 멸망한 907년부터, 송(宋)나라가 건국된 960년까지, 황하지역을 중심으로 화북을 통치했던 5개의 왕조(五代)와 화중, 화남과 화북의 일부를 지배했던 여러지방정권(十國)이 흥망을 거듭한 격변기를 가리킨다.
오대는 후량(후량), 후당(후당), 후진(후진), 후한(후한), 후주(후주)를 말하며, 십국은 오월, 민, 형남, 초, 오, 남당, 남한, 북한, 전촉, 후촉,을 포함한다.

곽희(郭熙)(1020~1090?) 북송(北宋) 하양 온현(河陽 溫縣) 사람.

신종(神宗) 희령(熙寧)초에 어서원예학(御書院藝學)을 거쳐 한림대조(翰林待詔)를 지냈다. 이성(李成)에게 한림산수(寒林山水)를 익히고 관동(關仝)의 화풍을 곁들여, 북방계 산수화 양식의 통일을 완성했다(郭熙派畵風). 화폭의 배치가 교묘하고 풍부했으며, 구도가 넓고 깊어 웅장했다. 대표작 “조춘도(早春圖)

곽말약(郭末若)(1892~1978) : 청나라 말 사천 낙산(四川 樂山)사람.

원명(原名)은 개정(開貞), 號는 상무(尙武), 별명은 정당(鼎堂). 1914년 일본에 유학하고, 1922년 낭만주의 문학단체 창조사(創造社)를 결성했다. 1937년 노구교사건이 일어나자 상해로 건너가 항일전선의 선두에 섰다.
시집 “여신, 별 하늘”을 냈으며, 갑골문과 금석문을 연구하고 “중국고대사회영구”를 저술하였고, “청동시대, 십비판서” 등 고대사상연구에 힘을 기울렸다.

한국 곽씨의 본관(本貫).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있는 “한국인의 족보”에 의하면, 곽씨는 문헌에 52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현풍, 청주 두 본을 제외한 50본의 성씨는 미상이라 하였고, 한국성보편찬위원회편(민중서각발행) “한국인의 성보”에 의하면 곽씨의 본관은 현풍, 청주, 선산, 해미, 봉산, 여미 등 6본이 전해지고 있으나, 청주를 제외한 나머지는 현풍에서 분관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전고대방(典攷大方)에 의하면 현풍, 청주, 선산, 해미, 봉산 등 5본이 올라있으나, 해미는 현풍에서 분관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음.

청주곽씨(淸州郭氏)의 연원

청주곽씨의 대동보에 의하면 신라 헌강왕조에 시중(侍中)을 지낸 곽상(郭祥)을 시조로 하고 있으며, 그의 13세손 연준(延俊)이 고려조에서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지낸 후 청원군(淸原君)에 봉해져 청주로 낙향, 세거(世居)하면서 관향을 청주로 하게 되었다.